Thursday, August 20, 2009

인연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제가 기억하는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가 있던 87년이었습니다. 저는 경기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고, 그는 기호3번 평화민주당 대통령 후보였습니다.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잠실 어느 공터에서 열린 그의 유세장을 혼자 찾았습니다.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 본 정치집회였는데,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노란색 트럭으로 만든 무대 위에서 그가 하는 연설을 군중 속에서 들었는데, 사실 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당시에는 TV에서 그의 목소리를 몇 초 이상 들려주는 일이 거의 없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좀 이해가 안되는 일이지만, 당시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신문 기사에 그의 이름조차 쓸 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연설을 듣고 제가 받은 첫 인상은 참 촌스럽다는 느낌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이전까지는 제가 별로 들어볼 일이 없었던 전라도 사투리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유세장 주변의 노점상들이 파는 연설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사가지고 집에 와서 틀으니까, "사투리 억양이 참 강하구나"라며 어른들이 말씀하셨던 일이 기억납니다.

저희 집안이 호남 출신도 아니고, 부모님이 그를 지지하지도 않았고, 제 주변에 운동권 형이나 누나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당시 저는 이미 그의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몇해 전 중학생 시절 우연찮게 그의 이름을 들은 이후,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조금씩 단편적이나마 알게 된 그의 생각에는 열여섯 살 소년이 당시의 세상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던 정의로운 목소리가 실려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지지하는 정치인을 가지게 되었고, 첫사랑이 대개 그렇듯 참 뜨거운 마음이었습니다.

그의 책을 사서 읽기도 했습니다. 전두환이 통치하는 대한민국의 서점에서 그의 책을 산다는 것은 조금은 가슴떨리고 조금은 위험한 일이었는데, 아직은 어린 고등학생이라는 신분이 오히려 더 자유로움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읽었던, 그가 감옥에서 쓴 편지를 모아놓은 책에 실린 원본 편지 사진의 깨알같은 그의 글씨를 보고, 그런 내용의 편지를 그런 글씨로 쓰는 사람이라면 더욱 괜찮은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부터도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비둘기로 만든 평화민주당 로고와 글꼴(왼쪽 사진에 보이는)을 당시의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로고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어했고, 강렬한 노란색으로 만든 아이덴티티도 참 좋아했습니다. 신문 1,2,3,4면 하단에 나란히 순서대로 실린 각 정당 선거광고 중에서도 기호 3번의 광고가 가장 세련되어 보여서 흐뭇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통령 후보가 훌륭하니까 그런 작은 부분까지도 신경을 써서 잘 만들었구나' 뭐 그런 식으로 오버하기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20년이 넘은 지금, 디자이너의 눈으로 다시 봐도 그리 촌스러워 보이지 않는군요.

두번째로 그를 본 건 그로부터 몇년 후, 제가 다니던 연세대학교 캠퍼스에서였습니다. 당시 저랑 같은 91학번 신입생이었던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어서 시국이 시끄럽던 때였습니다. 날마다 종로와 명동거리에서는 시위가 벌어졌고, 저녁마다 백양로에서는 최루탄을 기관총처럼 쏘아대는 검정색 차에 맞서 화염병을 던지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옷에서 최루탄 냄새가 좀처럼 가시질 않던 어느 늦은 봄날, 동아리 선배들을 따라 교내에서 열리는 무슨 집회에 갔는데, 그날따라 신문에서 보던 국회의원과 재야인사의 얼굴들이 많이 보이는가 싶더니, 당시 야당 총재였던 그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가 짧은 연설을 했었는데, 무슨 내용의 연설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그를 여기서 다시 보게 되는구나' 하는 반가움과, 오랜 시간동안 아스팔트 위에 앉아있던 탓에 다리가 무척 저리던 기억 뿐.

그를 대통령으로 가지고 싶었던 열여섯 살 소년의 꿈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나 이루어졌는데, 그 꿈이 이루어지던 날, 목놓아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의 恨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10년 동안 그를 외로이 좋아하면서 쌓여온 제 나름의 恨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취임식이 열리던 순간에 저는 이미 뉴욕에 와 있었습니다. 뉴욕에 온 첫 해, 저는 서울로 치면 명동성당쯤에 해당하는 St. Patrick's 성당에서 견진을 받고, 매주 일요일마다 미사를 드렸는데, 어느 일요일 미사 시작 전에 안내 방송이 나오더군요. 뉴욕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미사를 드리러 왔다는... 많은 이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을 했습니다. 너무도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그와 함께 미사를 드리고 난 후, 성당 뒷문 쪽으로 나와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가 뉴욕대교구 추기경과 함께 문을 열고 나와서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저와 그의 눈길이 마주쳤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게 제가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순간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5 comments | 댓글 읽기/남기기:

강모씨 said...

올해는 유난히 큰별이 많이 집니다.
우리에게 아직 별이 남아있기나 한지 모르겠군요.
...
준형씨는 일찌감치 트인 사람이었군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혼자 유세장을 찾다니,
연설 테이프를 사서 들을 생각을 하다니...

난 뭘했나 새삼 반성이 되면서,
그분이 말씀하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바로 나 인가.
어제 처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June said...

오늘 한겨레에 홍세화씨가 이런 칼럼을 썼군요.

"불의는 참고 불이익은 참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저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지, "나쁜 정당, 나쁜 신문"을 가려낼 줄 안다는 것에 스스로 위안을 삼고,
"불의를 참지 않는" 소수의 이들에게 마음으로만 지지를 보내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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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정당에 투표하지 말고,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집회에 나가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할 수 있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6월 한 오찬장에서 했던 말이다. 나쁜 정당, 나쁜 신문. 정명(正名)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보수도 소중한 가치이기에 그 정당을 보수정당이라고 부를 수 없어 극우정당 또는 수구적 보수정당이라고 부르곤 했다. 또 그 신문들을 보수신문이라고 부를 수 없어 몰상식한 수구신문 또는 신문의 탈을 쓴 사익추구 정치집단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아주 쉽고 간단한 이름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통곡으로써 반역의 시대를 증언한 김 전 대통령은 정명으로써 또 하나의 가르침을 남겼다.

양심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구분할 줄 아는 인간성의 조건이다. 일생 동안 식민지 조선과 중국 땅에서 불의에 맞서 싸웠던 김학철 선생은 “편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인간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편하게 사는 것’과 ‘인간답게 사는 것’을 대비시킨 것은 그의 삶을 반영하듯 칼날처럼 정확하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세태를 꿰뚫는 “불의는 참고 불이익은 참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들도 이 말을 비켜가지 않는다. 나쁜 정당이 집권하고 나쁜 신문이 영향력을 누리는 배경에 편안함을 추구하는 몸과 긴장하는 ‘행동하는 양심’이 소수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놓여 있는 것이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이 7개월이 넘도록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다. 참사 관련 조사기록 3000쪽을 아직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방송법을 불법적으로 밀어붙였고, 물과 전기·의약품까지 끊는 상황에서 사쪽과 최종 합의한 쌍용자동차 노동자 67명을 구속했다. 그런 정권이 화해와 통합을 말한다. 중국의 루쉰은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밖에 약이 없다고 했는데 미친 개가 몽둥이를 들고 날뛰는 듯한 상에 시달리는 것은 내가 불온한 탓이겠지만, 사회 구성원들이 편안함을 추구하면서 양심을 멀리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모질고 뻔뻔한 정권을 용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쁜 정당, 나쁜 신문은 나쁜 기업과 함께 지배의 삼각편대를 이룬다. "나쁜 기업"을 쓴 독일 출신 저자는 “우리의 삶을 은밀히 지배하는 유명 브랜드 기업들이 비인간적인 노동착취, 아동노동, 독재정권과의 긴밀한 협력, 전쟁, 환경파괴로 엄청난 이윤을 추구하고 있다”고 고발한 바 있다. 외국 기업이 주로 브랜드의 가치를 강조한다면, 한국 기업은 국가경쟁력을 특히 강조한다. 한국의 자본권력이 국가권력, 언론권력과 긴밀히 유착하는 또 하나의 이유인데, 기업의 국가경쟁력을 강조하는 것은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처럼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돌아올 편안함의 몫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뉴타운 공약이나 ‘747’과 만난다.

분명 나쁜 정당, 나쁜 신문이지만 다수가 그들을 멀리하기는 쉽지 않다. 윤리적 소비가 그렇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양심의 부름에 따라 불편함을 선택할 때 그 길이 조금씩 열릴 것이다. 그런 사회 구성원은 앞으로도 소수에 머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싸워왔는데 이 정도밖에 인간적인 사회를 이루지 못했나”라고 말하는 대신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룩한 것도 소수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애쓴 결과다”라고 말해야 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좌절, 절망, 한탄에 빠져선 안 되기 때문에.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June said...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은 글이 있어서 퍼왔습니다.
아무런 편견없이 한번 열린 마음으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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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고 일주일째인 8월 25일이었다. 집에 가져가 먹을 요량으로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 소음이 꽤 심했다. 길게 늘어선 줄, 사람들의 대화, 흘러 나오는 노랫소리.

내 손에는 한 시사주간지가 쥐어져 있었다. 그 겉면에는 환하게 웃으며 대중을 향해 두 손을 번쩍 든, 지금은 이 땅에 없는 흑백의 한 젊은 정치인이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그리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인상을 쓰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 이 사람은 왜 그렇게, 왜, 왜 그렇게 힘들게…….

내 세대는 김대중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대중의 나이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보다 한 살 적으니 내게는 꽤 먼 존재의 정치인인 셈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는 내 인생의 첫 번째 정치인이었다.

개 인적인 경험 탓에 나는 어릴 때부터 TV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살던 때를 제외하면 근 10년 동안 집에 TV를 둔 적이 없다. 논술을 준비하기 위해 시사 상식을 늘려야 한다고 시끄럽던 고등학교 때도 TV와 신문은 내게 너무나 먼 존재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꽤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대신 어릴 때부터 무언가 읽는 행위를 좋아했다. 집 앞의 책방 아저씨와 마음이 맞는 탓에 보고 싶은 책은 어떤 책이라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외상비는 부모님이 부담해야 했지만 한번도 내게 외상값으로 화를 낸 적은 없었다.

중 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정말로 매력적인 저자 한 명을 만나는데 그가 바로 강준만이다. 지금도 그만큼 균형 잡힌 비판을 하는 동시에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버리지 않는 지식인은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의 나는 그가 쓴 모든 저서에 넋을 빼놓을 만큼 빠져 있었다.

김대중. 강준만의 한 저서에 적혀 있는 그 이름을 시작으로 나는 이 정치인에게 빠져들었다. 파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그에 관련된 책을 수집했고 당시까지 그가 쓴 모든 저서를 읽었다.

김 대중 죽이기의 대표적인 위서로 뽑히는 '동교동 24시' 등은 노태우 후보가 무차별로 살포를 한 덕분인지 집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대대손손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인 나는 운 좋게도 내 자신의 정치관을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강요당하지 않고 확립할 수 있었던 셈이다.

비록 어린 나이에 불과했지만 압도적으로 그 양이 많았던 비난 일색의 서적 속에서도 그와 그가 속한 지역에 대한 한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때쯤 나는 여러 가지 집안의 비밀을 알게 된다. 할아버지는 선거에서 김대중 이외의 딴 후보를 단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다는 것. 경상도에서, 그것도 자자손손 그곳에서 산 할아버지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말로 특이하고 이상한 일이다.

할 아버지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평생 가슴에 한을 품고 사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고조부와 증조부는 대를 이어 항일운동을 했는데 특히 증조부는 한쪽 손을 못 쓸 만큼 심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이 그렇듯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에 관해선 너무도 쉽게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들이었으니 증조부 또한 그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권력 유지를 위해 친일파를 처단하지 않았고 그렇게 살아난 이들은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거꾸로 독립운동가들을 처단했다. 당연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승만 정권에 반기를 들었고 전쟁의 어수선한 틈은 그들을 모두 빨갱이로 만들어 죽이는 데 더없이 좋은 시기였다.

조부는 평생을 독립에 몸 바쳤는데도 빨갱이로 몰려 죽어간 아버지를 보며 죽음보다 더한 슬픔을 맛본다. 조부는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대표로 합동장례식을 치르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그 억울한 사람들의 묘를 포클레인으로 모조리 엎어 버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한 5.16의 실체(참여정부 제 5년의 기록 5부)라는 말은 바로 이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인 것도 모자라 그 유골까지 눈앞에서 깨부수는 것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조부는 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할 시간도 없이 444번이란 번호표를 달고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간다. 죄목은 빨갱이. 당시 정권의 '혁명재판'이란 것에는 이런 일은 일상에 불과했다.

김대중이 할아버지가 있는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온 것도 그때쯤이었다. 쿠데타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또는 반대할 만한 모든 사람을 닥치는 대로 고문하고 죽였다. 조부는 악명 높았던 서대문 형무소 동기인 김대중에 대해 어떤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한을 가진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동지의식으로, 응어리를 품고 사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연대의식으로, 억울한 사람들의 마음을 짊어진 사람만이 아는 그 무엇으로.

내가 아직 아무것도 몰랐을 때, 조부는 이런 말을 했다.

"그 사람은 감옥에서 봐서 됨됨이를 잘 알지. 해박하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참말로 그만한 사람 없다."

정치에 대해선 그다지 입을 열지 않았던 조부가 한 정치인을 칭찬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어릴 때부터 수재로 이름을 날렸던 조부가 상고 출신의 한 정치인을 치켜세우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무엇을 했고 어떤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하지만 내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그 사람이 평생 짊어지고 갔을 무수한 사람들의 한과 눈물이다.

(아래에 계속)

June said...

(이어서)

부친은 어렸을 적,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잠을 잘 때 매일 소리를 지르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친구 집에서 자고 왔더니 그게 아니었단다. 내게 할아버지는 인자하고 자상한 사람이었지만, 밤만 되면 죽음과도 같았던 고문의 악몽으로 평생 육체적인 후유증과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던 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그러했기에 말뿐이 아닌 온몸으로 그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김대중은 신념을 버리지 않은 탓에 평생을 가택연금과 고문에 시달려야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마어마한 고통과 가족들의 눈물 때문에 목소리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가슴 한구석 피로 맺힌 응어리가 있다. 나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전라도 사람들의 한이 그런 것이라 본다.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갔지만 그 억울함을 호소하면 빨갱이가 되어 버리는 세상. 억울함을 호소하면 차별하고 무시하고 짓밟는 세상. 김대중 이름 석 자를 말하면 빨갱이가 되기에 선생님이라 부르며 숨을 죽여야 하는 세상. 겨우 뱉은 선생님이란 한 단어도 '슨상님'이라며 조롱하고 짓밟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김대중은 그들에게 유일한 대변인이자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당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러 가면 대부분이 거절을 한다. 세상이 바뀐 줄 알고 말했더니 그 다음 정권이 와서 잡아가고 또 세상이 바뀐 줄 알고 말했더니 또 잡아가서 고문을 하니, 이제 그 두려움 때문에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두려움과 한이 지난 10년 사이에 조금은 녹을 수 있었다. 만약 그 10년이 없었다면 감히 일개 국민 따위가 정부를 상대로 억울한 죽음과 학살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2011년부터는 제주 4.3사건을 정부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제외한다는 이 시점에서 다시 억울하고 한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날까봐 너무 가슴이 아프다.

보수들이 형님처럼 따르는 나라 미국. 그리고 그 미국에 인정받기 위해 언론조작까지 서슴지 않았던 과거 독재 정권. 하지만 실제로 찰떡궁합이었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전두환 정권을 위협하면서까지('손석희의 시선집중' 8월 20자 인터뷰 전문 참조) 구하려고 했던 사람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과연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세계 강대국들이 모두 모이는 에이펙이나 아셈 같은 국제 회의에서 아시아 변방의 한 대통령이 우선 발언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국제 분위기는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프랑스의 총리가 살아가야 할 힘이자 도덕적 스승이라고 말하고, 독일과 미국의 수장이 앞다투어 존경심을 표하는 대통령.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에서 모두 이름만으로 소개를 하지만 오직 김대중 전 대통령 앞에만 "excellent leadership, President Kim"이라고 말해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그런 대통령을 우리는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세계가 구하려 했지만 한국이 죽이려 했던 사람. 한국의 독재자가 죽이려 했지만 세계의 양심들이 구하려 했던 사람. 기득권층은 빨갱이라 욕하지만 응어리를 가진 사람들은 말 없이 지지했던 사람.

그가 떠난 후,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역사를 편향된 논리의 독점 글쟁이들에게 맡기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나도 그처럼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깨어나 우리 후손들에게 진실을 전해 주고 싶다.

잘 가시오, 세계의 영웅. 그리고 우리의 한을 진심으로 이해했던 이여.


원문링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04902&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6

Anonymous said...

같은 지역에 살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고 학교도 같은 곳을 나오신 것 같군요. 그런데 하나 더 나으시면 웹 사이트 주소도 바꾸셔야 할 듯^^

뉴저지 사는 "newy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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